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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고구려시대에는 부여군(夫如郡) 지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에 한주(漢州-경기, 황해, 충북, 평남일부)의 부평군(富平郡)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 현종 9년 무오년(1028년)에 김화(金化)로 개칭되어 삭방도(朔方道-강원지방)에 편입 동주(東州-철원)에 속해 있었고, 인종 21년(1143년)에 다시 김화현(金化縣-監務를 두었다)의 지역이 되었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김화현(金化縣)으로 구획되어 현감(縣監)으로 개편되면서 현내면(縣內面)의 지역이 되었으며, 조선 고종 32년(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1895년 5월 26일 공포)로 전국에 도(道)를 없애고 23부(府)로 구획할 때 춘천부(春川府) 김화군(金化郡) 군내면(郡內面)이 되어 학포리(鶴浦里)와 사기막리(沙器幕里)로 있었으며, 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1896년 8월 4일 공포)에 의거 13도(道)로 구획할 때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 융희 2년(1908년)에 금성군(金城郡)에 통합되었다.

학사리의 연혁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로 부·군·면(府郡面) 폐합에 따라 금성군을 흡수(구역변경)하여 다시 김화군 김화면(金化面)이 되었고, 학포리(鶴浦里)와 사기막리(沙器幕里 사기점이 있었던 마을)를 병합하여 학포리의 학자와 사기막리의 사자를 따서 학사리(鶴沙里)라 했다. 1944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253호에 의거 읍으로 승격되어 김화읍 학사리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시대(日帝時代)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 지역이 공산치하(共産治下)에 예속되었으며,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을 없애고 창도군(昌道郡)에 흡수·통합시켰다.(북한은 1954년에 김화군을 복군 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가장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고 국군의 북진으로 북위 38도의 경계가 없어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새롭게 휴전선이 형성되면서 전 지역이 수복(收復)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1954년 10월 21일 공포)에 의거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이 시행되어 그 해 11월 15일 군정(軍政)으로부터 김화군의 행정권을 인수하여 관할하여 오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1962년 11월 21일 공포)의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시행으로 김화군이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학사리전경

생창리의 연혁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로 부·군·면(府郡面) 폐합에 따라 금성군을 흡수(구역변경)하여 다시 김화군 김화면(金化面)이 되었고, 노상(路上), 노하(路下), 내동(內洞), 신흥리(新興里)를 병합하여 생창리로 개칭하였다. 1944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253호에 의거 김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김화읍 생창리가 되었다.

청양리의 연혁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로 부·군·면(府郡面) 폐합에 따라 금성군을 흡수(구역변경)하여 다시 김화군 서면(西面)으로 되었고 초전(草田 샛골), 연동(淵洞 늪골), 수무정(樹茂亭), 지경(地境), 장림리(長林里), 원우촌(院隅村) 등을 병합하여 청양리로 개칭 하였다.

청양리전경

도창리의 연혁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로 부·군·면(府郡面) 폐합에 따라 금성군을 흡수(구역변경)하여 다시 김화군이 되어 초북면(初北面-近北面)의 도창리(道昌里)에 초북면의 우구동(牛·洞), 험석리(險石里)와 서면(西面)의 서업리(鋤業里)를 병합하여 서면(西面)에 편입 하였다.

도창리전경

근북면 유곡리의 연혁

일제시대(日帝時代)인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공포)에 의거 부·군·면(府郡面)을 폐합할 때 금성군을 흡수(구역변경)하여 다시 김화군으로 개명 소생하여 근북면(近北面)이 되어 원북면(遠北面)의 지갑(地甲), 사동(蛇洞), 율목(栗木), 내촌(內村), 상두촌(上斗村), 하두촌(下斗村), 두포(斗浦), 장지(長芝), 신대(新垈), 성암(城巖), 수양정(垂陽亭), 사기점(沙器店), 건천(乾川), 단암(丹巖), 황룡(黃龍), 광연(光淵), 산현(山峴), 안장(安壯), 상수한(上水汚), 하수오(下水汚)의 20개 동을 병합하여 금곡(金谷), 백덕(栢德), 유곡(楡谷), 율목(栗,木) 두촌(斗村), 성암(城巖), 건천(乾川), 산현(山峴)의 8개리로 개편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시대(日帝時代)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 이북이 되어 공산치하(共産治下)에 예속되었으며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화군을 없애고 창도군(昌道郡)에 흡수·통합시켰다.(북한은 1954년에 김화군을 복군 하였다)
1950년 6·25전쟁 이후 국군의 북진에 의하여 북위 38도의 경계가 없어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새롭게 휴전선이 형성되면서 일부지역이 수복되어 군정(軍政)이 실시되었으나 근북면은 민간인통제선(군사분계선 남방 15km 범위 내) 북방의 휴전선 접적지역으로 주민이 입주하지 못했다.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1954년 10월 21일 공포)에 의거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의 시행되어 그 해 11월 15일 군정(軍政)으로부터 김화군의 행정권을 인수하여 휴전선 이북지역인 두촌(斗村), 성암(城巖), 건천(乾川), 산현(山峴)리의 4개리를 제외하고 유곡리(楡谷里)와 백덕리(栢德里)를 관할하여 오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1962년 11월 21일 공포)에 의거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시행되어 근북면이 철원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30일 정부의 “통일촌” 건립계획에 의거 예비군 60세대를 선발 입주 정착하면서 마을을 되찾았으나 면사무소를 설치하지 못하고 김화읍 행정관할하에 있으며, 법정리(法定里)는 유곡(楡谷), 율목(栗木), 백덕(百德), 금곡(金谷)의 4개리이며, 이중 유곡리만 행정리(行政里)다.
1990년 6월 13일 철원군조례 제1309호(1990년 6월 13일 공포)로 “철원군 리의 이름과 구역에 관한 조례” 개정으로 휴전선 남쪽 비무장지대에 일부가 위치한 금곡리(金谷里)와 율목리(栗木里)를 철원군으로 편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