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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오대쌀 홍보동영상

밥 맛좋은 쌀, 철원 오대쌀

철원오대쌀은 철원의 지리적 특성, 즉 춥고 긴 겨울, 큰 일교차, 기름진 황토흙, 청정한 물, 공기 등으로 특정한 맛과 품질을 형성함으로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에서 지리적 특산품으로 등록된 우수 농산물입니다.
2005년 12월 26일 지리적표시등록(등록번호 제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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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두루웰쌀 홍보동영상

철원농업의 변천과 철원오대쌀 오대 브랜드 스토리 홍보 및 쌀 등급제 대처방안 심포지엄
철원평야는 지금으로부터 27만년전 신생되, 평강산암쪽에 위치한 해발 453m의 얕트막한 오리산이 화산폭발 하여 만들어진 용암대지이다.철원평야는 전체 넓이가 약 35000h로 DMZ인근 전방의 제성평과 동성읍 일대의 대야잔평으로 크게 두군데로 구분된다.
제성평에는 태봉국 도성이 자리하고, 대야잔평은 조선, 태종, 세종, 문종 임금이 자주찾던 사냥터였다.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에서는 비옥한 토질과 일교차가 큰 기후와 DMZ의 청정수가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밥맛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철원군이 전국적인 농산물 생산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전후의 일이다.
대륙진출의 대동맥인 경원선이 1914년 부설되면서 철원은 경기 북부와 강원, 강북 지방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변모하게 된다.
그후 10여년 뒤인 1923년에는 철원북방에 봉래호저수지가 축조되고 다음해 1924년에는 경상도를 비롯한 전국의 농민들이 철원으로 대거 이주 하면서 대규모 개관사업이 진행되었다.
경원선 부설과 봉래호 저수지를 축조하는 등 철원평야 개관을 위해서 전국 각지와 중국 러시아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철원군 인구는 당시에 8만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철원쌀은 품질을 인정받아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아 경원선과 원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이제 그 봉래호 개발이 1919년대 그때서부터 시작되서 1924년에 완결이 되면서 같이 농경지가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이쪽에서 이제 이민들 농사이민들을 모아다가 시작이 됐는데 그러면서 중앙수리조합이 설립이 됬어요."
"철원의 경제 면적이 10,000h정도 였었고, 전국에서 그 익산인가 거기꺼를 빼놓고는 우리가 두번째로 큰 중앙 수리조합이였었고,우리가 역사상으로 국니에 있잖아 국니에 도성을 만들고 그다음에 봉래호를 하면서 전국단위 그때는 이건 전국에서 이주를 시켰거든 그니깐 그거를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는얘기야 우리인구 가지고는 북면에는 패안도청이 있었다고, 패안도청이 그니까 경상도촌, 전라도촌, 패안도촌, 함경도, 그러니까 얼마나 큰 대역사였었나 하는것은 이야기 할것도 없지.. 근데 우리가 그런 사실상 그런 ...."
1920년대를 전후해 전국적 쌀 생산지로 변모했던 철원평야는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철원읍 시가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주변에 방치된 농지는 사람키 만큼 자란 버들가지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었다.
[철원농업의 변천과 철원오대쌀] - 오대 브랜드 스토리 홍보 및 쌀 등급제 대처방안 심포지엄

1. 철원평야
철원평야는 지금으로부터 27만년전 신생되, 평강산 암쪽에 위치한 해발 453m의 얕트막한 오리산이 화산폭발 하여 만들어진 용암대지이다. 철원평야는 전체 넓이가 약 35,000h로 DMZ인근 전방의 제성평과 동성읍 일대의 대야잔평으로 크게 두군데로 구분된다.
제성평에는 태봉국 도성이 자리하고, 대야잔평은 조선, 태종, 세종, 문종 임금이 자주찾던 사냥터였다.
강원도 제1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에서는 비옥한 토질과 일교차가 큰 기후와 DMZ의 청정수가 어우러져 전국에서 가장 밥맛좋은 쌀이 생산되고 있다.

2. 일제시대 철원농업 현황
철원군이 전국적인 농산물 생산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전후의 일이다.
대륙진출의 대동맥인 경원선이 1914년 부설되면서 철원은 경기 북부와 강원, 강북 지방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변모하게 된다.
그후 10여년 뒤인 1923년에는 철원북방에 봉래호저수지가 축조되고 다음해 1924년에는 경상도를 비롯한 전국의 농민들이 철원으로 대거 이주 하면서 대규모 개관사업이 진행되었다.
경원선 부설과 봉래호 저수지를 축조하는 등 철원평야 개관을 위해서 전국 각지와 중국 러시아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철원군 인구는 당시에 8만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철원쌀은 품질을 인정받아 국내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아 경원선과 원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Q. [경원선 부설과 봉래호 축조 당시 철원농업의 현황]
"이제 그 봉래호 개발이 1919년대 그때서부터 시작되서 1924년에 완결이 되면서 같이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이쪽에서 이제 이민들 농사이민들을 모아다가 시작이 됐는데 그러면서 중앙수리조합이 설립이 됬어요."

Q. [당시 철원군 경작지 규모]
"철원의 경제 면적이 10,000h정도 였었고, 전국에서 그 익산인가 거기꺼를 빼놓고는 우리가 두번째로 큰 중앙 수리조합이였었고, 우리가 역사상으로 국니에 있잖아 국니에 도성을 만들고 그다음에 봉래호를 하면서 전국단위 그때는 이건 전국에서 이주를 시켰거든 그니깐 그거를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야 우리인구 가지고는 북면에는 패안도촌이 있었다고, 패안도촌이 그니까 경상도촌, 전라도촌, 패안도촌, 함경도, 그러니까 얼마나 큰 대역사였었나 하는것은 이야기 할것도 없지.. 근데 우리가 그런 사실상 그런 ...."

3. 수복직후 농지복구와 정착
1920년대를 전후해 전국적 쌀 생산지로 변모했던 철원평야는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으로 인해 철원읍 시가지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고, 주변에 방치된 농지는 사람키 만큼 자란 버들가지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었다.
동족 상전의 비극 6.25 전쟁이 실현되고 철원은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다. 휴전선과 DMZ과 민통선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농토에는 이들영농출입을 허락받아야 겨우 제한된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한편 철원평야를 빼앗긴 김일성이 철원평야 젖줄인 봉래호 저수지 물길을 막아버려 철원군 농업은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정부를 이를 극복하는 대체 수자원을 확보하고자 1967년 대규모 인공저수기인 토규저수지를 10여년의 공사 끝에 1976년 완공하였다.
1976년 토교저수지 완공과 아울러 기존의 저수지 보강공사를 서두르고 한탄강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양수장을 설치하여 현재의 전천후 농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Q. [토교저수지 축조 상황]
"그 공사가 67~68년도 착공당시에 지역 국회의원이 김재훈 씨예요. 이 분이 이 저수지 하나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68년도에 착공이 되었습니다. 한 10년 전에 많은 논이 지금은 장비로하지만 그때는 들 것이나 리어카 등 순순히 노력으로 이 저수지를 막았죠."

Q. [토교저수지 공사에 투입된 인원규모]
"많게는 300명 넘을때가 있었고 평균 160명은 덤프트럭으로 4~5대가 전야 아침이면 싣고 들어오고 저녁이면 싣고 나가고 굉장했었죠.."

Q. [토교저수지 공사가 10여년이나 걸린 이유]
"여기 보시다시피 여기가 평야 아닙니까? 근데 이 흙을 실어다가 이렇게 상토를 했으니까 참 많은 시간이 걸리죠. 근데 이 흙은 저수지를 막는 흙은 진흙 이걸로 하기 때문에 11년이란 세월이 걸렸죠."

Q. [토교저수지가 철원농업에 끼친 영향]
"저수지라는 이 토교저수지의 물은 수심도 깊지많은 물이 양도 많고 우선은 이 물이 적절한 온도 곡물이 좋아하는 17~19도 이 정도의 물이 평상온도를 유지하고 바로 논으로 가니까 철원 수도장만큼은 냉해를 안입죠.
그러니까 쌀이 전국에 최고라고 볼 수 있죠. 이 정말 토교저수지는 철원군의 정말 효자죠."

4. 농업근대화의 물결 녹색혁명
1970년대 철원군 농업은 녹색혁명 개최 아래 식량자급을 이루기 위해 다수확 품종 보급과 객토 병충해 방제와 퇴비 채취등 식량증산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1972년부터 보급된 통일벼는 저온에 약하고 밥맛은 좋지 않았지만 다른 벼품종보다 30%이상 생산성이 높아 1976년 역사단 최초로 쌀 자급을 이루었다.
농촌지도소 및 해당 기관에서는 고온 비닐못자리 설치를 강요하고 모내기를 조기에 완료하며 병충해 공동방제를 즉계 실시하고 마을별 퇴비채취, 객토등을 적극 동요하였다.
모내기나 추수등 농번기에는 일손돕기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한달여간은 공공기관은 물론 학생들이 동원되어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주로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농업은 1977년 양지리의 영농기계화 시범단지에서 처음 콤바인 시현회가 열렸고, 그다음 78년 철원군 영농기계화사업소가 발족되어 본격적인 기계화 영농이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기계화영농을 시작한 후 1986년 철원군 농기계 보유 대수는 14,000대로 전국 최고였다.
이는 철원농업의 일손 부족 해결과 축산, 양봉, 인삼 등 복합영농으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5. 철원오대쌀 탄생과 성공신화
1980년대 식량자급문제가 해결되면서 밥맛좋은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철원군도 기후와 풍토에 적합한 새로운 벼 품종 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
10년간에 연구개발을 거쳐 1982년에 탄생한 것이 오대벼인데 처음에는 생산량이 많지 않아 주목받지 못했다.
오대벼는 철원지방에서 7월말경 출수하는 조생종으로 이삭이 길고벼알이 드물게 달렸으며 씨알이 굵은편이며 찰기가 있고 밥맛이 좋다.

Q. [철원군과 철원오대쌀의 관계]
"오대쌀은 이 철원군의 재배환경과 딱 부합이되는 품종입니다. 철원오대쌀은 쌀알이 굵어서 다른 지역에 심으면 등숙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철원은 아주 등숙조건이 좋아서 그 오대쌀을 잘 생산해낼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해서 철원 오대쌀이 육성되므로 해서 철원군이 쌀에 1등지역으로 부상이 되었습니다."

Q. [조생종으로서의 철원오대쌀]
"철원 오대쌀이 나오기 전에는 주로 추방벼가 재배가 됐는데 그때까지는 철원쌀이 아주 시장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대쌀이 개발되므로해서 비로소 철원쌀이 유명해 졌는데 철원오대쌀이 나오므로해서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추석무렵에 좋은 햅쌀을 먹을수있는 그런 혜택을 주게 되었습니다."

Q. [철원오대쌀의 상품성 계기]
"쌀의 상품성이 올라간 계기는 1990년대 초에 철원과 동송농업을 중심해서 미국초리장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쌀의 브랜드가 아주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Q. [철원오대쌀과 브랜드]
"철원오대쌀이 개발될 때 이렇게 호응이 될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나 철원오대벼나 철원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이미 자리가 잡혔고 철원오대쌀이라고하는것은 철원이라는 지역을 명하고 오대벼라는 품종명이 합쳐진 브랜드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브랜드입니다."
철원의 오대벼는 일교차 큰 기후에서 잘 여물며 냉한 날씨로 병충해 발생이 적고 DMZ의 청정이미지까지 곁들어져 도시소비자들이 선호한다.
우리나라 벼품종명 브랜드의 효시인 철원오대쌀은 1990년대 미국종합초리장이 준공되면서 쌀의 품질이 한단계 더 높아졌다.

Q. [농업환경변화에따른 대처방안]
"그동안의 우리 철원농업은 미작중심의 단순농업을 지향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제 농업은 쌀농업만 가지고는 한계가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생각을 해보고요 앞으로 쌀농업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신작목 개발이라는지 작목 다양화를 통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될때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Q. [새로운 소득작목 철원군 현황]
"저희들이 지금 하우스 면적이 250h 정도 늘어나서 김화권역에 새로운 소득작목으로 부상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350h까지 늘려서 어떤 교셥력도 확대하고 여름철의 우리지역이 주산지로서의 역할을 해내갈수있도록 추진해나갈 그런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Q. [농촌체험관광의 현황과 전망]
"농촌체험관광 이런 것이 말뿐이였고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지금 직접 농가, 마을에서 직접 해보다보니까 소득과 연결되는 부분도 있고 하니까 이제는 어떤 꼭 이런일들을 해야겠다는 자극제는 되고 있습니다.
하드웨어측면에서 보강이되고 한다고 하면 앞으로 우리 철원농업도 관광하고 연결되서 다양한 소득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FTA가 이제 진전이 되고 개방화 진전이 되면서 세계가 무한경쟁시대에 돌입이 되었습니다.
농가들이 상당히 어렵고 힘들고 여건이 어렵습니다 만은 좌절하지 마시고 희망을 갖고 저희들도 뒤에서 열심히 뒷받침하도록 노력을 해 나가겠습니다.
우리 철원 농민 화이팅!"

6.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철원농업
현재 농업 환경은 쌀 소비감소과 FTA체결로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벼농사 위주의 철원군 입장은 더욱 어려워 졌지만 토마토, 오이, 파프리카 등의 재배를 늘려 어려운 농업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확된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은 국내뿐아니라 일본에서도 인기가 좋아 수출하고 있다.
농촌 어메니티를 살린 체험관광도 활성화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철원농업은 철원오대쌀 명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품질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이미지 제거를 위하여 철원농산물 브랜드스토리를 개발해 널리 알려야 한다.